장영실은 세종대왕 집권기 활약한 발명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발명가로 누구나 한번쯤은 떠울릴 만큼 그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관노출신으로 그의 어머니가 관기였다. 신분을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의 배경을 비춰봤을 때 당시의 업적을 세울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으나 능력 그자체를 인정해주는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 그의 날개를 펼 수 있었다.
그는 세종대왕 집권기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처음 발탁한 것은 태종이었다. 세종 역시 선대 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그를 중용하였다. 장영실은 그의 나이 약 34세일 때 그의 공을 인정받고 면천되었고 관직을 받았다.
장영실의 발명품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수많은 천문기구들을 만들었다. 게다가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금속제련의 전문가로서 계속해서 중요되었는데 세종대욍의 어가가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나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곤장형을 받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그의 형을 삭감해주었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았을 때 그가 능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업적을 세우고 관직에 까지 올랐으나 그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은 당시 양반들에 눈에는 좋게보이지 않았고 언제든지 그를 폄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양반은 핏줄에 의해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활약하고 있는 천민출신의 장영실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세종대왕 역시 왕으로서 그에게 관직을 주고 수많은 권한을 주고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관료들로부터 수많은 우려와 상소를 받았다. 세종대왕의 어가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사실 그것이 장영실이 책임자이긴 했으나 본인의 탓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기회를 노리던 관료들에 의해 중형을 내릴 것을 종용 받았고 세종대왕 역시 그를 아무런 형벌도 내리진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장영실은 이 사건 이후 역사속에서 사라진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발명품들을 남겼고 천민 출신임에도 당시에 위치에 올라갈 정도로 그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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