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고려를 세운 왕건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인물이다. 하지만 꼭 왕건이 아니더라도 인물 그 자체에 매력과 서사가 있어 수많은 작품에서 그가 등장하는 것을 볼수 있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그가 태어날때 문지개를 닮은 흰빛이 비췄다는 얘기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난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불길하게 여겨 왕명으로 그가 갓난아기 일때 죽이려 하였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트린 궁예를 밑에 있던 유모가 받았고 이 때 죽지는 않았지만 눈을 다쳐 한 쪽 눈이 실명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궁예의 애꾸눈은 갓난아기때 이미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모에 의해서 길러진 궁예는 훗날 유모를 통해 출생의 비밀을 듣고 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로인해 그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고 한다.
신라 각지에서 거듭된 흉년과 함께 세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봉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시기 궁예는 절을 떠나서 여러 무리들을 찾아다녔는데 최종적으로 당시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큰 군벌인 양길에게 의탁한다. 양길은 궁예를 인정해 주었고 그에게 군사를 주어 자신을 따르게 했다. 이 시기 궁예의 기록들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인성도 좋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양길의 휘하에서 시작한 궁예는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갔고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있었다. 궁예가 세력이 점점 커가자 주변의 호족 세력들이 차례로 투항하여 그 세력은 눈에 띄게 커졌고 궁예는 스스로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된다. 이시기 왕건의 아버지인 왕릉도 투항한 호족 세력 중에 한명이었다. 그의 아들인 왕건에게 관직을 주고 임무를 맡겼는데 그의 능력이 뛰어나 궁예는 오랜기간 그를 신임하였다. 몇년 후 한 때 그를 받아주었던 양길은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그를 공격하였는데 오히려 궁예에게 큰게 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궁예는 901년 스스로 후고구려의 왕임을 칭하였다.
궁예는 한참 그가 성장하던 시기 백성으로부터 신임 받는 좋은 지도자 였지만 왕이 된 이후 권력에 취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단순한 폭정이 아닌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며 이해하기 힘든 잔인하고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하였다. 수많은 불교 경전들을 지었고 드라마 '왕건'을 통하여 수많은 패러디와 밈으로 까지 생성된 관심법은 자신이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시대의 지식인이자 엘리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하들은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여 신격화하는 모습에 반감이 생겼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호시탐탐 그를 축출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궁예는 관심법으로 자신의 아내였던 왕후 강씨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고 왕건 역시 관심법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뻔 하였으나 최응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불러 역모를 꾀한 것에 대하여 추궁하였고 왕건은 그런적이 없다고 대답하였으나 옆에있던 최응이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 조언을 해주었고 왕건은 거짓으로 자신의 죄를 고하였다. 이에 궁예는 왕건의 정직함을 칭찬하며 오히려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궁예에 대한 역사의 기록들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작성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궁예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들은 과도하게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였기데 이에대한 명분을 위해서도 궁예는 몰아내지 않으면 안됐을 왕으로 그려졌다. 앞서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가 되어 살아남은 자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패자에 대한 기록들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고려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실제 당시 상황을 보면 궁예가 쫓겨나기 얼마전 부터는 폭정을 했던 정황들이 보이나 집권 초기부터 대부분의 기간들은 성정을 펼쳤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던 호족세력들의 연합으로 축출되었고 그 선두에 오랜기간 궁예의 측근으로 큰 활약을 보이며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왕건을 세우게 된 것이다. 실제로 왕건은 즉위 이후 이런 호족세력들을 잠재우기 위하여 수많은 지방 호족들의 자식과 혼인을 맺어 가족의 연을 맺게 된다.
궁예는 왕건의 반란으로 쫓겨난 이후 죽음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다. 도망치다가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고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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