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고려의 첫번째 왕이다.
왕건은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의 아들로 궁예에게 의탁하여 그의 장수가 되었다. 그는 궁예의 장수로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후고구려의 세력을 넓히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역사적 라이벌이었다 할 수 있는 후백제의 견훤과 수차례 교전하여 그를 격파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젊은 나이에 조선시대의 재상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운 이후에도 후백제의 견훤과 지속적으로 세력다툼을 벌였다. 왕건은 왕위에 오른 이후 융화적인 정책을 펼쳤는데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이 투항했을 때도 그들을 모두 받아주었고 수많은 지방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하여 다툼의 싹을 최소화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왕건의 출생과 관련된 수많은 설화와 출생시 신비한 광채와 자주빛 기운이 방안을 비췄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기존의 왕을 몰아내고 오른 왕의 자리였기 때문에 그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그를 신성화 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의 수많은 설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왕건은 어렸을 적 부터 풍채도 좋았으며 병법에 능하고 덕망이 높았다 그덕에 그를 따를는 무리들이 항상 많았고 그 덕에 궁예는 자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그를 항상 경계했으나 결국 그의 손에 왕에서 물러났다.
왕건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의 대한 신격화는 여러곳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가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견훤을 대상으로 승승장구 했으며 나주 등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또다른 기록에는 구예가 직접 나주에서 견훤을 상대하여 승리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역사적인 정황상 왕건은 견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궁예의 가치를 낮추고 왕건을 신격화 함으로서 고려 건국의 정당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은 시중의 자리에 올랐을 때 공정하게 국정을 처리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노력했고 이 결과 많은 장수들과 지식인들이 그를 따르게 되자 왕건은 오히려 궁예가 자신을 경계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청하여 변방으로 가 수군을 지휘하였다.
궁예의 이야기에서도 서술했듯이 궁예는 관심법을 통해 왕건에게 역모를 꾀한 것에 대해 추궁하였는데 왕건은 오히려 거짓으로 역모를 시인하여 궁예는 왕건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오히려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궁예의 행동들로 인해 왕건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실제 역모를 꾀할 결심을 하게된다.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지은 것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후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에서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옮기며 왕으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왕이 된 이후 여러방면으로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빈민구제기구를 설치하였으며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는 고려의 국호답게 북진정책을 펼쳤으며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숭불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때 왕건은 나라의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이는 결국 고려말기 불교의 타락으로 이어지며 오히려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왕건은 후삼국 시기 신라를 대상으로 회유책을 펼쳐 투항하게 만들었고 견훤과도 초반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 군사적인 충돌이 이루어졌고 왕건역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지만 결국 후백제를 이기고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시켰다. 이후 발해 유민들 뿐 아니라 신라, 후백제의 유민들을 대상으로도 융화정책을 펼쳐 통일 이후 민생을 안정화 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자신도 호족 출신이었으며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호족세력들을 완전히 통제하진 못하였다. 호적세력들과 수많은 결혼을 융화정책을 펼쳤던 그는 복잡한 자신의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 그의 죽음 이후 혼란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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