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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신라의 27대 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

진평왕의 큰 딸로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이는 기록상으로 한국최초로 여자가 왕이 된 사례이다.

선덕여왕 집권시기는 대외적으로 쉽지 않은 시기였다. 삼국시대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중국의 당으로 부터 끊임없이 간섭을 받았다. 하지만 고구려의 존재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사례는 드물었고 고구려가 건제해야 신라도 편안할 수 있었기에 실제 당이 쳐들어왔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도운 사례도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끊임없이 동맹을 맺고 파기하고를 반복했고 그건 신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덕여왕은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노력을 했던 흔적이 많이 보이는 왕이었다. 집구너 초반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다수 펼쳤고 지금까지 위대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남아있는 첨성대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등이 있다.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고 황룡사 9층석탑은 높이 80m정도의 거대한 탑으로 9의 적을 물리쳐 복속시키기위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전 많은 왕들은 자신의 권위와 나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큰 건축물을 세워 세를 과시하였다. 이는 나라의 기술과 인력의 동원등 중앙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진나라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역사적으로 그 사례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왕위에 오른 뒤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당태종은 하얀색 모란꽃 그림을 선덕여왕에게 보냈다. 당시의 꽃그림들을 보면 나비나 벌 등이 같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선물한 그림에는 나비나 꽃이 없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이라는 의미로 선덕여왕을 희롱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기록을 보면 실제로 당태종이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에는 그렇게도 뛰어난 남자가 없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다수의 귀족 자제들을 당으로 유학보내는 등 당에대한 외교를 친밀하게 유지하였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하게 여겨 후에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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