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은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으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신라에 귀순한 가야의 왕손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15살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의 화랑의 인기는 대단하였는데 지금 시대로 치자면 아이돌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그 뜻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각종 전투에 참여한 전투집단의 이미지가 강한 화랑은 그 뜻이 '꽃처럼 아름다운 남자'다 화랑은 국가적인 단체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민간 단체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열세였던 신라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애국운동을 펼치면서 형성된 단체이다. 김유신은 이 화랑에서 가장 유명한 화랑 중 한명이었다.
김유신의 동생은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하였다. 이는 김유신이 전략적으로 자신의 동생을 김춘추에게 노출 시킴으로서 결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삼국 통일의 주축이 되는 둘의 만남은 김춘추가 왕이 되기 훨씬 전부터 가족으로 이어졌다.
선덕여왕의 집권기 비담이 난을 일으켜 김유신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이 성쪽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이를 본 비담이 여왕이 패할 징조라는 소문을 퍼트려 반군의 사기를 높이고 관군의 사기를 떨어트렸는데 이 때 김유신이 꾀를 내어 연에 불을 붙여 하늘에 띄워 보냈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연이었다. 이후 김유신은 동요하는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선덕여왕 이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고 진덕여왕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유신은 당시 최고의 의사 결정기관이었던 화백회의의 결정을 뒤집고 자신의 친인척이었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김유신의 권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종 무열왕(김춘추)당시 김유신은 그 유명한 황산벌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김유신은 백제의 10배에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계백과 대치하게 된다. 이 때 유명한 관창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숫자가 한참 적은 백제군에 힘들어하던 신라의 화랑이었던 어린 관창이 단신으로 백제군에 수차례 쳐들어가 목숨을 잃자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올라 백제를 이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이야기의 관창은 김유신과 함께 가장 유명한 화랑 중에 한명이다.
김유신에 관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젊은 화랑 김유신이 한 기생에 반해 그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부모님과 다시는 그 기생을 찾지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유신이 술에 취해 잠깐 잠이 든 사이 자신의 말이 주인이 늘 가던데로 그 기생집에가서 멈추자 잠에서 깬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다.
김유신은 전쟁에서는 군의 최고위직으로 전시가 아닐 때는 신라의 재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당시로서는 많은 나이인 79세에 사망할 때까지 그 권력을 유지하였다. 김유신에 관한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은 아직까지 많이 전해지고 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인물을 다룬 열전 10권 중 총 3권에 달하는 분량을 김유신으로 채우고 있을만큼 그를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앞선 글들에서도 끊임없이 언급했듯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최종 승리자인 신라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미화의 글들이 가장 많이 작성됐으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록에는 그가 정치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전시에는 뛰어난 전략과 전술가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 10배에 달하는 병력을 데리고도 계백을 바로 잡아내지 못했으며 당시 백제군의 몇배에 달하는 신라군이 전사하였으므로 사실상 계백에게 패한 전투나 다름 없다. 또한 자신의 핏줄들을 왕가에 시집을 보냄으로서 전형적인 외척정치를 이어간 인물이다. 삼국의 통일에 관한 이야기도 신라와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부풀려져 있으나 고구려의 자멸과 당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라의 힘만으로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