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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 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조선의 첫번째 왕이다.

이성계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투항하여 몽고군의 괸리가 되었고 이성계의 조부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세습하였다. 이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대에 이르러 공민왕 집권기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죄를 사하여 주는 조건으로 공민왕에 투항하여 공을 세우고 벼슬을 받았고 이성계는 아버지의 관직을 세습하여 고려의 북쪽 경계선을 지키는 고려의 장수가 되었다.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이 출몰하여 나라가 흉흉하였는데 이성계는 여러 전쟁에 참여한 강력한 수천의 사병을 이끌고 있었고 수차례 왜구와 홍건적을 퇴치하여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다. 그러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는데 이 때 이성계가 자신의 사병 2,000을 데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고 1362년 함흥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크게 퇴치하였다. 강력한 군사력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변방의 귀족에 불과했던 이성계를 단숨에 정계의 주요인물로 편입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이제 이성계는 온나라의 백성으로 부터 신망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국가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시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정치에 편입하고 싶었던 이성계는 당시 권력을 잡지못한 비주류였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음으로서 단순한 장수가 아닌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이 시기 이성계는 모든 전장에 정몽주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고 한다. 이 때 이성계는 자신의 운명 뿐만 아니라 고려의 운명을 바꿔놓을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이 함주에 있는 막사에 수시로 방문하여 국가의 정세에 대하여 의논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진사대부와의 관계로 인한 영향으로 고려의 우왕에게 안변책을 건의 하였다. 안변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일개 장군이 제시한 정책이라고 볼수 없다. 안변책의 내용은 군사훈련, 백성을 보호하고 군량을 확보할 것 토지제도의 개혁 그리고 유능하고 공정한 인물을 관리로 임명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388년 명나라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우왕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하기 적절치 않은 시기라는 이유로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다 이 때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사유를 들어보면 타당해 보인다.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위험이 크다는 점,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전쟁을 일으킬 경우 왜구의 침략이 우려된다는 점, 여름철이므로 전영병이 생길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요동 정벌을 발대하였고 이는 '4불가론'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우왕은 요동 정벌을 강행하였다.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한 고려군은 압록강 근처 위화도에 이르렀고 고려의 운명을 바꿔놓을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진다. 이 때 계속되는 비로 요동정벌을 취소하고 회군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결국 회군하였다. 이 때 고려군이 진군했던 기간 보다 회군하는 기간이 절반 밖에 소요되지 않아 이성계가 애초보투 권력을 잡을 목적으로 계획한 일이라는 해석도 있다. 

회군한 이성계는 최영과의 전투 끝에 개경을 점령했다. 이후 최영을 제거하고 군사실권을 장악함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이후 고려말 국가재정 고갈의 원인이 되었던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기존의 권력층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성계는 온건 개혁파였던 정몽주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이후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을 때 공양왕을 도와 이성계의 측근들인 정도전, 조준 등을 유배 보냄으로서 이성계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정도전의 복귀 이후 1392년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 처음에는 민심을 고려하여 고려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한다. 1394년에는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령했다. 이때 한양으로 천도를 하며 경복궁과 한양의 성곽등 주요 건축물 등은 정도전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그의 의견이 적극 반영되었다. 여담이지만 경복궁 역시 정도전이 설계하였는데 경복궁의 전체를 잘 들여다보면 왕이 업무에 집중하는 것으로 맞춰줘 있고 이후 조선의 왕들 중 재위기간 동안 경복궁에서만 생활하며 이를 적극활용했던 왕은 드물었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이성계는 이후 왕위 계승에 불만이 있던 이방원에 의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자신의 자식들이 왕위 게승을 둘러싸고 서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큰 충격을 받고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넷째 아들인 방간과 이방원이 다시한번 대립하여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결국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이방원을 피해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고 태종은 수차례 차사들을 보내 아버지가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권유하였으나 이성계가 이 차사들을 모두 활로 싸서 죽여 함흥으로 간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있다. 이성계는 '조산의의 난'을 통해 이방원을 쳤지만 패배하였고 아이러니 하게도 강력한 장수였던 이성계의 유일한 패배였다. 훗날 이성계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창덕국에서 지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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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태종(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왕들 중 자신의 시호보다 실제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유일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3대 왕이며 세종대왕의 아버지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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