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왕들 중 자신의 시호보다 실제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몇 안되는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3대 왕이며 세종대왕의 아버지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의 계승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으나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왕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인물 중의 하나로 남들이 가장 꺼려했을만한 일들을 거침없이 해냈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인 토대는 정도전이 만들었으나 이방원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이방원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것을 기대했다.
모든 국가들의 말로가 그러하듯 고려말 부패와 향락은 극에 달했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을 때 북방의 지방 호족에 불과했던 이성계와 그의 아들들은 고려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군사적인 활약을 펼치며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성계와 함께 이방원은 백성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은 인물 중에 한명이었다. 고려말 이미 나라의 국운이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이 가득한 여러 신하들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하였고 그 중심에는 정몽주가 있었다. 선죽교에서 만난 이방원과 정몽주 사이에 오고 갔던 '하여가'와 '단심가'는 지금 까지도 유명하다. 이후 이방원이 선죽교 위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역사서에서는 선죽교 위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에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몽주를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이성계는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몽주를 제거하는 것을 꺼려했고 이방원은 아버지의 의사와 상관 없이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하지만 이방원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를 제거하긴 하였지만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 정몽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내림으로서 건국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역사에 충신의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기록되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국가의 정사에는 실제 그 인물의 업적과 상관 없이 패배한 편에 섰던 인물들은 승리자에 의해 부패하거나 죽임을 당하기 마땅한 인물로 기록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몽주에 대하여 진심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은 정도전에 의해 왕이 아닌 신하와 백성이 만들어가는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고 왕은 그저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나 오래된 무신 집안의 이방원은 절대군주제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나라를 원하였다. 정도전과 이방원은 이런 사상에서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하였다. 결국 1398년 이방원은 일명 '왕자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쿠데타를 통해 정도전과 그의 추종 세력들 그리고 왕세자들을 죽이고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후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자신의 쿠데타를 도왔던 이방간 까지 죽여버렸다. 이성계가 일찍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종에서 왕위를 물려줬으나 이러한 이방원을 두려워했던 태종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 퇴위함으로서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가장 피를 많이 묻힌 왕으로 그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들을 무수히 죽인 이방원을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으려 하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 자신의 꿈꿨던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위해 귀족들이 사병을 유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반란의 싹을 잘라버렸고 토지, 세금, 호패제도 신설 등 조선의 초기에 해당하는 법을 재정비 하였고 정도전을 제거하긴 하였으나 그가 정비한 제도등을 대부분 유지하였고 유교를 근간으로 삼으려했던 그의 유지를 바탕으로 고려시기 부패와 향락의 온상이었던 불교의 사찰들을 폐쇄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여 국고로 편입시켰다.
실제로 그는 제위 기간동안 조선을 완전히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탈바꿈 시켰고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왕권을 위협할만한 개국 공신 그리고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세자 이도의 장인을 비롯한 외척 세력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서 왕권을 위협할만한 대부분의 인물들을 제거해버렸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왕이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다음 왕의 총명함과 시너지를 이루며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루는 기간이 되었는데 그 것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조선의 태종, 그는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탐했던 인물이지만 나라의 큰 발전을 이룬 기틀을 마련한 왕이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해 매력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며 여러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