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는 조선의 세종대왕 제위기간 동안 가장오래 그의 측근에서 재상으로서 재임했던 인물이다.
황희는 '황희 정승' 이라는 것이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정승의 이미지가 강하다. 조선의 세종대왕의 시대에 가장 태평했던 시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기에 조선왕조에서 가장 유명하며 청렴하고 능력이 뛰었났던 재상으로 알려져있다.
그에 관해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는 유명한 일화들이 몇가지 있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런 잘 알려진 일화들로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자신의 여종 두명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중재를 나섰더 황희가 한 쪽 여종의 말을 듣고 '니 말이 맞다' 하였고 다른 한 여종의 말을 듣고도 '니 말도 맞다' 하니 여종들이 그럼 누가 맞고 누가 틀렸냐고 물었고 황희는 둘다 맞다고 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을 얘기하려고 한다는 말로 교훈을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는 황희가 길을 가는데 누렁소와 검정소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나 누가더 일을 잘하냐고 물어보니 농부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얘기를 해주니 황희가 의아하게 생각하여 왜 조용히 얘기하냐고 물으니 농부는 한 쪽이 더 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나머지 소가 속상해할 것 아니냐 라는 얘기를 듣고 황희가 큰 깨달으을 얻었다고 한다.
황희는 조선의 재상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고려 시대에 처음 관직에 올랐던 인물로 조선 건국당시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개성의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후에 조선에서도 관직에 올랐는데 정승이었던 박석명이 지금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지신사에 그를 추천하여 처음 태종의 눈에 들게 되었다. 사실 태종은 그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했던 이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만약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황희정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석명의 사후 황희는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된다. 공신으로서의 대우를 받았으며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하니 그 신임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다.
기록들을 보면 황희는 특이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다. 태종 제위기간 부터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해 파직과 복귀를 수없이 반복했다. 신임을 받던 태종시기에도 후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등 여려가지 사건으로 인해 파직과 복귀를 반복했으며 세종시기에도 태종의 강력한 추천으로 중용되었으나 여러가지 잘못들로 인해 파직과 복귀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8년간이나 재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뛰어난 정승의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실 황희의 이미지는 관료세력들에 의해 크게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념과 기득권 세력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뛰어난 관료의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서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관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왜 존재해야하고 좋은 관료가 나라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기록함으로서 양반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황희의 이미지가 크게 미화되고 부풀려졌다는 역사적인 근거들이 있다. 청령함 이미지로 잘 알려진 황희 였지만 그가 매관 매직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살인을 저지른 사위의 죄를 줄이기 위하여 당시 정승이었던 그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희는 실제 이 사건으로 파직 되었으나 세종에 의해 일주일 만에 복귀하게 된다 또한 '박포의 난'으로 알려진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청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는 조부시절 부터 부자였고 세종시기에 많은 전답을 하사 받았기 때문에 평생을 부자로 살았다. 하지만 그 덕에 백성을 수탈하거나 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두 아들이 세조 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으로서 정승을 지내면서 기록에서 그를 더욱더 미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미화된 것은 사실이나 정승으로 중용될만한 여러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글에도 뛰어났으며 수차례 파직을 당하더라도 왕에게 자신이 할말을 할 정도로 강직함이 있었으며 자신의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지 않아 왕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만한 원인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꽤 훌륭하여 그가 부임했던 지역의 주민들이 그가 떠날 때마다 아쉬워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세종 시기에도 건강등을 핑계롤 스스로 사직을 여러번 하기도 하였으나 그대마다 세종이 다시 불러들여 결국 87세가 될때까지 재상으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당시로는 드물게 90세까지 장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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