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조선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명으로 조선 전기에는 세종대왕, 조선 후기에는 정조대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성군인 정조의 최측근으로도 유명하다.
다산은 일찍이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아 조선의 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는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시기 조선 왕에게 인재양성을 위한 중요한 기간 이었던 성균관 유생들과 대화를 할 기회들이 많았는데 이시기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대답에 정조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는 이 둘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또한 천주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정약용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뒷밤침해줄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정약용의 직계 가족들은 조선 천주교의 시작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누나는 한국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 결혼하였고 천주교회 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은 한국 최초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정약용의 외삼촌 역시 카톨릭 신자였으며 천주교리에 따라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일반적인 유교의식을 거부함으로서 불경죄로 고발되어 처형당했다.
다산은 또한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유교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토목공학에도 관심이 많아 현재 수원에 위치한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을 설계하였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정순왕후에 의한 천주교 숙청으로 인해 갖은 고문 끝에 천주교 신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지금의 포항에 몇 달간 유배되었다. 이후 다산은 강진 일대를 자유롭게 유랑하였다. 이후 그는 강진이 내려다보이는 어머니의 먼 친척집에 거처를 정하였고 유배 10년을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유배 기간 동안 그는 여러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이때 집필한 책으로 유명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있다. 오랜 유배 생활에 그에게는 힘들었을 수 있으나 주옥 같은 책들을 대량 집필함으로서 후세에는 오히려 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법학, 정치이론, 한국식으로 해석된 유학 등 특정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저서를 남겼다.
실용주의로 대표되는 다산의 철학은 그는 실존적인 문제의 해결에 힘썼으나 그 과정에서 개인 또는 정부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였으며 백성의 빈곤과 관련하여 깊은 고민을 하였고 공직자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였다. 그는 정부와 관료들이 백성의 민생을 해결하는데 반드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었으며 청렴하게 공정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공직자의 삶을 강조하였다. 이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고위층의 도덕적 해이 현상과 더불어 새롭게 재조명 되고 있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을 세운 철학자 정도전 (0) | 2023.04.22 |
---|---|
동아시아 철학 (0) | 2023.04.19 |
동양철학 (인도철학, 불교철학,이슬람 철학) 의 세계 (0) | 2023.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