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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조선의 16대 국왕이다. 
인조반정을 통해 백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선조의 아들로서 능양군이던 시절 왕위 계승 서열에서 최하위 수준이었으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왕위에 오른 왕들은 모두 인조의 직계 들이다.

인조반정

광해군은 아버지인 선조와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재위기간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전란을 무난하게 수습하면서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왕궁 재건등이 폐위의 도화선이 되어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광해군을 몰아낸 반란 세력들의 명분은 어머니와 형제에게 가족으로 서의 예를 다하지 않고 잔인하고 혹독하게 다루었다는 점과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예를 다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인들의 논리는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명나라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오랫동안 쩔쩔맸던 것에 비춰보면 명의 임장을 대신했다는 명분은 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조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동생이 광해군으로인해 역모죄로 몰려 억울하게 고문 당하고 자살까지 했으므로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이들이 대외적으로 세웠던 명분 때문에 자신의 백부를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광해군은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고 후금과의 사이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묘호란

 반정 주축세력들은 사실 실리를 추구하던 주화파들이었기 때문에 강하게 후금을 배척하지는 않았고 인조 정권 역시 광해군이 해온 실리외교를 계승하는 분위기 였으나 백성들을 대상으로는 유교국가로서 '친명배금'을 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후금이 1627년조선을 침략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때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공신으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은 품은 북방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이궐의 난'으로 인해 제대로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이 때 조선은
'정묘화약'을 통해 후금과 형제국으로의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명나라는 국력이 약해질대로 약해져 망국의 직전에 와 있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이어갔고
후금은 이런 조선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정묘호란 8년뒤 후금은 인열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사신을 보내 조문을 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형제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로 모시라는 압박을 하게되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고 사신단을 위협하자 이들은 도주했으나 문제가 커질 수 있음을 인지한 인조가 다시 불러들여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인조가 전국에 '철화교서'를 내려 후금몰래 후금의 침략을 방비하려 했으나 이 교지를 후금에 탈취당하여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병자호란

 결국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이들은 1637년 조선을 급습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청나라는 수비를 하고 있던 성들을 피해 수도로 바로 진격하였으며 이로인해 도주할 시간이 부족했던 인조는 조선의 왕들이 주로 도망을 쳤던 천혜의 요새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피하게된다. 청나라가 보낸 선발대는 300 정도에 불과 했는데 이궐의 난 이후 반란을 우려한 조정에서 군부대의 훈련을 심하게 검열하여 훈련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고 반란을 우려하여 무능력한 자들을 관리자로 임명하여 조선의 군사들은 사실 오합지졸들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청나라의 침략시 조선의 군부대는 심각할 정도로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47일간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벌인 이후 항복을 하게 되고 인조는 굴욕적으로 신하를 뜻하는 푸른색 의복으로 갈아입고 지금의 잠실지역인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뜻하는 '삼배구고두례'를 올리게 된다. 꽁꽁언 한강위에 재단을 만들어 인조는 얼음바닥에 강하게 머리를 찧는 예를 취하다가 이마가 찢어지는 굴욕까지 당하게 된다. 이후 청은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과 조선의 여자들을 볼모로 끌고 간다.
 청나라는 이때 끌려갔던 여자들을 후에 조선으로 돌려보내게 되는데 당시 이 여자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이라고 하여 '환향녀'라 불렸고 이후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를 일컫는 속어인 '화냥년'이 되었다. 조선의 아픈 역사가 만들어낸 비속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연인

병자호란은 최근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도 재조명되고 있고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통해 명배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등의 연기를 통해 비록 소설 원작이긴하나 47일간의 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접할 수 있다. 병자호란은 조선역사에 가장 치욕적으로 왕이 직접 항복을 했던 사건이고 청의 명에 따라 조선이 직접 조선을 침략한 청의 업적을 기리는 '삼전도비'를 세웠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여러차례 여러 세력들에 의해 삼전도비는 땅에 묻히고 복원되기를 반복했으나 치욕적인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므로 이를  숨기고 은폐하는 것은 우리가 욕하는 중국, 일본등의 역사 왜곡과 다를바가 없으니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남한산성

소현세자의 죽음

소현세자가 볼모로 끌려가 이후 오히려 인조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는데 청으로 끌려간 세자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청과 잘지내는 모습을 보였고 문화적으로 급격하게 발전한 청을 보고 배우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에 대해 화가 남과 동시에 청과 사이가 좋은 세자가 청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인조를 끌어내리고 세자를 왕위에 앉히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으므로 세자의 이러한 태도는 인조의 의심과 적대감을 키우는 꼴이 되버렸다. 이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는데 독살당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병사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소현세자의 사후 인조가 한 행동을 보면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이려고 지시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소현세자의 사후에 원칙적으로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는게 맞으나 인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 된다.
인조는 자신의 손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지 않은 것으로 부족하였는지 자신의 며느리였던 강빈을 누명을 씌워 죽이게 되는데 인조의 후궁이었던 소용조씨를 저주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소현세자 사후 4년 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인조는 1649년 병사하게 된다. 
https://chamingshu.tistory.com/entry/%EA%B4%91%ED%95%B4%EA%B5%B0

광해군

광해군은 조선의 500년 역사에서 폐위된 후 복원되지 않고 왕의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2명의 왕중에 한명이다. 왕으로서 제위 기간을 정상적으로 채우지 못하고 폐위된 왕은 왕의 정식 칭호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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