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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조선왕조 실록에 유일하게 외모에 대한 칭찬이 기록되어진 여성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의 최고의 미인을 꼽을 때 항상 언급이 되는 인물이다. 

장희빈

그녀는 경종의 생모로서 조선 숙종의 빈으로 본명은 장옥정으로 알려져있다. 

장희빈은 중인 집안의 자제로 역관 출신인 아버지의 밑에서 비록 출신은 높지 않았으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그녀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는 점만 뺀다면 조선에서 누구도 부럽지 않은 집안이었다. 당시 궁녀로 들어갔던 대부분의 여자들이 궁핍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팔려가듯 입궁했다는 사실에 비춰봤을 때 장희빈이 굳이 궁녀로 들어갈만한 이유는 찾기 어렵고 그녀의 입궁시기 또한 불분명하다. 고위 관직자였던 아버지의 사촌형이었던 장현이 경신환국 이후 남인들의 입궁제의를 받아 입궁시켰다는 설이 있지만 시기적으로 경신환국 당시 이미 장희빈의 나이가 20세가 넘었던 시점이었으므로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아버지 장형이 그녀의 나이 11세에 죽고 가세가 기울어 궁녀로 입궁시켰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그녀의 집안 전체의 부를 봤을 때 가세가 기울어 그녀를 궁녀로 입궁시켰다는 설도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궁녀가 된 장희빈은 자의대비 조씨를 모셨는데 장씨가 강제 출궁되었을 때도 자의대비가 친히 장씨가 궁밖에서도 잘 생활 할 수 있게 배려해주고 그녀의 재입궁을 주선한 것으로 보아 자의대비가 각별히 그녀를 예뻐했음을 알 수 있다.

1680년 숙종의 첫째 부인이었던 인경왕후 김씨가 요절하는데 기록상 장씨가 승은을 입은 것은 이시기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같은 해 장씨는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강제 출궁되는데 명목상으로는 그녀가 왕을 모시기에 출신이 비천하고 다음 중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출궁시켰다고 하나 실제로는 경신환국 당시 장현 일가를 몰아낸 것이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오빠인 김석주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인 이유로 후환이 두려워 그녀를 출궁시켰다는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1683년 대비 김씨가 병을 앓고 있던 숙종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기도하다 감기에 걸려 사망하였는데 대왕대비 김씨의 3년상이 치뤄진 바로 다음 해에 장희빈은 재입궁하게 된다. 이는 자의대비가 그녀의 재입궁을 권고했다는 설도 있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아픈 숙종을 위해 인현왕후가 그녀의 재입궁을 먼저 권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인현왕후 민씨를 등에 엎은 서인들의 반대 세력으로 남인들은 장희빈을 등에 엎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따라 서인들은 끊임없이 장희빈을 멀리해야한다는 상소를 했으나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희빈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숙종은 한때 장희빈을 정말로 총애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인현왕후와 후궁 김씨의 처소가 있던 곳에서 떨어진 창경궁에 비밀리에 장희빈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여 지내게 하였고 후궁의 칭호를 내리고 후에는 후궁중에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빈' 그리고 훗날의 일이이지만 중전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로 정하고 훗날 세자로 책봉하고 왕의 자리까지 오른다. 이는 중전인 인현왕후가 아직 가임기 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출신을 고려하여 중전의 첫째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기 때문이다. 또한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린 것 또한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중전의 자리를 정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 아닌 궁녀출신의 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준 것 또한 조선 역사에 최초의 일이었다. 

장희빈이 원자를 출산하고 숙종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장희빈의 산후조리를 도울 것을 명하여 장희빈의 어머니가 입궁하였는데 이 때 그녀가 옥교를 타고 입궁하다 관권들이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매질 하였는데 그들의 논리는 3품 이상 문관의 어머니와 아내로 정해져있던 옥교를 탔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이 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서인 쪽 사람이었던 이익수가 장씨에 대한 반감으로 행해진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왕의 어명을 받고 입궁하는 사람에게는 그 표식을 달게 했는데 이 표식을 달고 있는 가마였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행위였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여 당시 관계자들을 직접 고문하여 2명이 죽었다. 이후 숙종은 당시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며 이를 계기로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들을 불러들인다. 이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서인 하여 출궁시켰고 이 과정에서 서인들이 완전히 축출되고 남인이 득세를 하게되는 기사환국이 발발한다. 인현왕후를 내보낸 후 숙종은 중전을 새로 뽑지 않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왕비가 된 이후 장희빈은 아들을 하나 더 낳게 되고 이례적으로 태어나자마자 대군의 예우를 받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급사한다. 

장희빈은 왕비가 된지 불과 1년만에 숙종이 돌연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이 과정에서 원자의 친모인 장희빈을 우호하는 신하들의 반발로 인해 갑술환국이 발발하고 다시한번 정권이 바뀌게 된다. 장희빈은 왕비에서 다시 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였지만 후사를 보지 못하고 지병을 앓다가 사망한다. 이후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혐의로 장희빈의 죄를 묻고 장희빈은 결국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죽음을 맏이하게된다. 

인현왕후의 복위 전 숙종은 후궁을 하나 더 들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숙빈 최씨로 훗날 영조의 어머니이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로 그녀가 숙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장희빈은 그녀를 불러 매질을 하거나 항아리에 가두는 등 그녀를 괴롭혔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숙종을 보며 불안함을 느꼈던 것으로 보여진다.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불러 들이는 것에 숙빈 최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에 저주로 벌을 받은 것 또한 장희빈의 처소에 차려져 있던 신당은 원자의 건강을 빌기위한 것으로 꽤 오래전부터 차려져 있었다는 것을 숙종또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벌이 내려진다. 다소 억울할 수 있는 벌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지만 다수의 매체에서 극적으로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장례는 조선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예우로 치뤄졌다. 그녀의 모든 장례는 궁에서 주관하여 치뤄졌으며 왕과 왕비의 장례와 같지는 않았으나 그에 준하게 치뤄졌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의 다른 역사에도 그러하듯이 자신의 생모인 장희빈을 왕비로 추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장희빈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 이후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는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고 그녀는 지금도 장희빈으로 알려져 있다. 

장희빈은 숙종에게 실제로 총애를 받았다고 보여지나 모든 남녀의 사랑이 그렇듯이 훗날 숙종의 사랑이 식으면서 그의 정치적인 희생량이 된것으로 보여진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오가며 신하들의 신권을 낮추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장희빈

장희빈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그의 용모와 함께 왕의 여자로서 전례없는 기록들을 남김과 동시에 기구했던 운명으로 인해 다수의 작품에서 그녀를 묘사하고 있고 한 때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에게만 돌아가는 배역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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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조선의 왕)

숙종은 조선의 제 19대 왕으로 장희빈과 관련된 일련의 기록들로 더욱 유명한 왕이다. 숙종은 재위기간이 46년에 가까워 자신의 아들인 영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긴 왕이며 58세의 지금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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