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조선의 500년 역사에서 폐위된 후 복원되지 않고 왕의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2명의 왕중에 한명이다. 왕으로서 제위 기간을 정상적으로 채우지 못하고 폐위된 왕은 왕의 정식 칭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끝나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광해군을 제외한 다른 한명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왕으로 폐위되어 마땅했으나 광해군은 정치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
광해군은 사실 후궁의 아들로 선조의 차남이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형 임해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궁을 버리고 도망을 가면서 자신을 대신해 후방을 정리해줄 세자가 필요했는데 이는 전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매우 위험한 임무였으므로 선조의 큰 아들인 임해군과 선조가 아끼던 광해군의 동생 영창대군을 대신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훗날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고 용감하여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고 백성들을 돌보는데 힘을 쏟아 많은 백성들로 사랑을 받았다. 이순신과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보다 인기가 많은 세자의 존재가 선조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 즉위 이후 영창대군을 앞세운 소북방파가 역모를 꾀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 역시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건이후 광해군은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려 애썼지만 기득권 세력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보여주었던 성군의 면모를 정치적으로도 보여주었다. 전란 이후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토지에 대한 조례를 개정하고 사람들에게 재분배 했으며 문서의 복원에 힘썼으며 호패제도를 재도입하였다. 호패제도는 나라의 백성의 현황을 파악하고 군역을 치를 수 있는 인원들을 선별하는 기능을 했기 때문에 단순히 신분증으로서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교적으로도 힘을 썼는데 명나라와 만주족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고 1609년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또한 가장 큰 업적으로도 평가 받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세금을 보다 쉽게 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문서의 출간을 장려하였는데 이 시기 유명한 동의보감을 비롯한 많은 책이 빛을 보았다.
광해군은 1623년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었다. 제위기간 동안 추진 되었던 창덕궁을 비롯한 왕궁의 재건 사업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왕궁 재건 사업은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했으므로 백성들을 대상으로한 세금과 노역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으로서 왕궁을 재건하는 것은 왕가의 권위를 살리고 나라의 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광해군으로서는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폐위되어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단 2명 중에 한명으로 기록 되게 되었으나 정말 폐위될 정도의 왕이었는지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