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이다. 의자는 그의 이름이며 왕의 시호는 사후에 부여되기 때문에 마지막 왕으로서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의자왕은 타락한 왕의 상징적인 인물로 항상 거론되고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에서 의장왕을 '3천궁녀 의자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을만큼 의자왕 하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살아 망국을 자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는 한 때 '해동증자'라고 불릴만큼 명석하고 우애가 깊으며 뛰어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왕의로서 즉위한 직후부터 신라와 전쟁을 벌여 40여개의 성을 빼앗았고 이 과정에서 대양성을 함락할 당시 당시 대야성의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죽이기 까지 한다. 당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신라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신라가 당의 신임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따라 당에서 신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라고 하자 당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이것이 652년의 일이었고 당과의 관계는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회복하지 못한다.
의자왕이 즉위한지 15년 정도 됐을 때부터 백제의 정치적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의자왕이 사치스럽게 궁을 짓고 밤낮으로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이를 비판한 신하들에게 벌을 주었고 귀족들의 토지를 압수해 왕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강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나 오히려 귀족들의 반감을 사게된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내부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섣 결국 때를 놓치게 되고 계백이 이끄는 정예병은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패배하며 5천명에 가까운 정예병이 전사하였고 백제의 정예병이 잇따라 패전하며 사비성에 고립되게 된다. 이때 태자가 직접 연합군을 찾아와 철군을 요청하고 음식등을 보냈으나 협상에 실패하고 결국 같은해 8월 29일 항복하게 된다. 이 때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이 자신의 의사로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배신한 신하에 의해 사로잡혀 강제로 항복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의자왕은 왕자들, 대신들과함께 낙양으로 압송되어 백제가 멸망한 660년 사망하였다.
백제 멸망당시 3천의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은 현재 부여에서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1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관리가 잘 되어있고 경관이 빼어나다.
삼국유사에 궁년들이 물로 뛰어들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 3천 궁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의자왕의 행적을 보면 즉위 직후부터 신라를 압박하며 왕의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방탕하고 무능력한 왕으로 기록하며 신라의 백제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궁궐을 지으며 세금과 인력을 쓰면서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신라들의 토지를 압수하여 왕자들에게 나눠주는 과정에서 백성과 신하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의자왕은 비록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망국을 초래하였지만 우리가 '3천궁녀 의자왕'으로만 알고 있을 정도로 무능력한 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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