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잘 알려진대로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이후 강화도에서 노비처럼 살고 있던 왕족을 불러와 왕위를 이은 것이 철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때 최종 후보에 흥선대원군이 올라갔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이 최종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어릴적 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척세력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안동김씨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왕이 유리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왕이 되지 못했다. 철종이 즉위한 이후 왕족들은 누구라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안동김씨 세력들은 왕권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유배보내거나 죽여버렸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흥선군은 목숨을 부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일부러 거리의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망가진 삶을 살았다. 안동김씨 세력으로 부터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가 심해 상가집에서 안동김씨 세력이 던져준 음식을 개처럼 주워먹었다던지 하는 일화가 있지만 이는 정사가 아닌 야사로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실제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주색에 빠져사는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행동이 맞다면 이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망가진 삶을 살던그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풍수지리상 좋은 충남 예산으로 옮긴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흥선군은 어렸을 적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요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으며 명예직으로 녹봉만 받을 수 있었다. 능력이 있고 야망이 있던 그로서는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일부러 망가진 모습을 보인 그의 계획이 효과가 있었다 안동김씨 세력이 그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선군은 철종이 또 후사가 없이 병석에 눕자 궁내의 궁녀들과 환관들을 포섭하여 궁안의 정보들을 수집한다. 이 때 흥선군은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게될 경우 다음 왕에대한 지명권이 있던 조대비 '신정왕후'를 포섭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을 신정왕후의 남편인 효명세자의 양자로 호적을 옮기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조대비의 입장에서는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왕의 어미로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수가 되었다. 흥선군이 자신의 장남이 아닌 어린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이유는 장남 이재면은 이미 장성하여 왕위에 오를 경우 조대비나 흥선군이 수렴청정을 할 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흥선군의 계획대로 둘째 아들이 훗날 철종이 뒤를 잇게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이 즉위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고 공식적으로 조대비가 흥선군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하게 하니 호적상으로는 아버지가 아니나 왕의 생부로서 흥선대원군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왕의 생부가 섭정을 하게되는 최초의 사례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생각에서 기반했던 것인지 권력을 잡은 이후 왕의 종친들과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확대했다. 그리고 여러 당파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안동김씨 세력을 대부분 몰아내고 실력을 바탕으로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스스로도 외척 세력인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멸시와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고종의 왕비 간택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그 결과 간택된 것이 민씨 집안의 민자영이 최종 간택되었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이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났으므로 민자영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가 아버지가 없고 혈육이 없는 점을 높이 사 최종적으로 그녀를 왕비로 간택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어렸을 적 보였던 총명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집권당시 정치적으로 뛰어난 모습들을 보여준다. 앞서 말했던 인사개혁을 시작으로 국방력을 정비하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실행하였고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선이 되기 위한 노력들을 보여준다. 또한 토지와 세금을 정비하고 오랫동안 여러 폐단을 만들어 냈던 서원의 대부분을 철폐하였다. 이는 양반 세력들의 반감을 사는 계기가 되었고 임진왜란이후 없어진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이로인해 백성들과 양반 모두에게 원성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집권당시 서구 열강들의 동아시아 침략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시기였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를 의식하여 철저한 쇄국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미군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이 있었는데 이는 서구 열강이 침략하게 하는 명분을 만들어주게 된다.
쇄국정책은 초반 실제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는데 주효하게 작용했으나 조선이 절대강자라고 믿었던 청나라가 무참하게 패배한 아편전쟁이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은 감안한다면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쇄국정책을 펼친 것은 결과적으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훗날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손으로 간택했던 명성왕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똑똑하고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고 어린 고종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자 섭정이 아닌 친정을 펼칠 것을 선언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권력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몰아낸다. 왕이 성인이 되었고 친정을 직접 선포한 이후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강행한다면 이는 역모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물러난 이후 명성왕후 민씨 일가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졌고 고종은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고 나름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명성왕후 일가의 횡포를 좌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별개로 존재하고 있던 구식군대가 차별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여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다시 복귀하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권력 일선에서 순순히 물러난 것처럼 보였으나 호시탐탐 복귀를 꿈꿨다. 그가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명성왕후를 암살하기 위한 모의를 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권력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에 억류되어있던 흥선대원군은 귀국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는데 명성왕후를 비롯한 여러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운현군에서 머물게 된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고종의 폐위와 함께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일본에 의해서 재집권을 하였으나 일본의 뜻과 다르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자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이후 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다시 재집권하였으나 끊임없이 명성왕후 시해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이후 양주에서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난초 그림을 잘그려 예술적 자질도 뛰어났다. 석파란 등으로 유명하며 그가 꾸민 정원으로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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