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님은 1876년에 태어나 조선 총독부 시대를 지나 대한제국의 몰락을 겪으며 독립과 자주를 위한 노력을 키웠다. 그는 경성서원에서 서양학문을 배우고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키우면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상을 형성했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독립당을 창설하고 독립신문을 펴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무장투쟁과 비무장투쟁을 포함해 다양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그의 역할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이 있었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독립당의 주축 인물로서 자주와 민주주의를 옹호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미국정부의 협력을 받으며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하기를 원했고 김구 선생님은 이런 통치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김구의 정신과 이승만 정부의 통치 방식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님은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해 이루어졌고,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한국독립당 내부적인 갈등으로 살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김구 선생은 그의 장례식에 50만 가까운 인파가 몰릴 정도로 국민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죽음에 대한 대통령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 발표의 내용이 논란이 많은데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수장에 대한 안두희의 ‘의거’라고 발표했다. 후에 밝혀진 얘기지만 당시 군 당국의 주요 인물들 중 친일의 잔재세력들이 암살을 주도했고 당시 정황상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이 사건을 묵인해준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이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안두희는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바로 사면되고 군인으로 복권되었으며 군납 공장을 운영하며 여유로운 삶을 산적도 있으나 이후 수차례 살해위협 및 테러를 당했고 결국 80세의 나이에 김구 선생님의 추종자에 의해 살해 당했다.
김구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대한민국 현대사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수도 있다.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가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었고 목숨을 걸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일생도 그렇지만 영화 같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사람들의 기억에 더욱 오랫동안 남게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미래를 배우듯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일생을 바친 사람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비참한 결말을 맞는 상황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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