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반 까지도 내 젊음은 무한할 줄 알았다.
젊음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가능성'이다. 지금은 별 볼일 없어도 10년, 20년 후에
나는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다 30후반, 40대 초반이 되면 죽음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평생을 곁에서 함께하고 나의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주셨던 부모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다.
꼭 나의 부모님이 아니어도 나를 친 자식처럼 살갑게 대해주셨던 친한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떠나기 시작하는 때가 이 시기다.
이 때 처음으로 죽음이 나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20대 중반에 친한 친구의 어머님이 한분 돌아가셨는데 지병이 재발하면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군인 신분이었던 나는(장교로 40개월 복무했다.) 3일 장 내내 곁을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게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남아있다.
굉장한 미인이셨던 친구의 어머님은 외모 만큼이나 까다로우셔서 친구들을 집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셨지만
나를 유독 이뻐하셨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친구들 중 나만 유일하게 그 집에서 밥도 여러번 얻어 먹었다.
장례식장에서 꽤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상복을 입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내던 친구의 모습도 어린아이한테 남의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당시 부모님들은 대부분 50대셨고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님도 5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러다 더 갑작스럽게 죽음이라는 것이 내 마음속 깊숙히 박히는 일이 생겼다.
1살이 많았지만 동갑내기 친구들 보다도 더 친하게 지냈던 대학교 친구가 서른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 연락을 받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고도 아니었고 암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일도 아니었다.
친했던 또래의 죽음은 더 이상 남의 일은 아니었다.
당시 장례식장에서는 평소 감정표현이 없던 한 친구가 오열하는 것을 보고 나는 오히려 울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내 또래 지인들의 부모님 장례식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당시 친구 어머님의 장례식장에서 만큼 눈물을 보인적은 없었다. 아니다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무겁다.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걸 알게됐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어차피 생기지 않을 일이라면 아무리 떠들어도 타격감이 없지만 누구나 맞이할 일이라면, 더군다나 당장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 수 십년간 암투병을 하시면서 건강관리를 하시는 어머님을 둔 입장에서 누구보다 가까울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지 않는 것 같다.
한동안 난 또 죽음과 떨어져 지냈지만
최근 가장 친한 친구놈 중에 하나가 갑작스럽게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러 들어갔다.
내가 직접 챙긴 건 아니지만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까지 친구와 통화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내 친구중에 가장 재미있는 친구인데, 웃기기만 한게 아니라 본인도 항상 유쾌한 친구다
그 친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들려준 목소리는 잔뜩 겁에질린 목소리였다.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않지만 그 목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고 항상 내 주변에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그렇다.
물론 수술실에 들어간 내 친구는 완쾌할거고
전보다 더 건강하게 제2의 인생을 살게될거다
죽음을 잊지는 말고 그렇다고 신경쓰지도 말자
우선 지금을 열심히 살자
죽음과의 거리
2024. 8. 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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